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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하이재킹>은 단순한 하이재킹(비행기 납치) 범죄를 소재로 한 스릴러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1971년 실제 발생한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남북 분단이라는 비극의 역사와 이념의 대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무력 충돌이 아닌 ‘하늘 위의 납치극’이라는 비정상적 사건을 통해, 영화는 1970년대 한반도를 뒤덮은 불안감, 공포, 그리고 시대적 무력감을 정면으로 조명한다.
이념의 시대, 비행기라는 무대
비행기는 본래 자유와 희망의 상징이다. 하늘을 날며 경계를 넘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문명의 산물이다. 그러나 <하이재킹>에서 비행기는 그 자유로움의 상징에서 극단적인 통제와 공포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공중에서 벌어진 납치 사건은 곧 승객 모두를 남북한 이념 대립의 장으로 밀어 넣는다. 이 작은 공간 안에서 인물들은 생존을 위한 결단, 국가와 체제에 대한 충성심, 그리고 가족과 신념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당시 한국 사회는 냉전의 최전선에 놓여 있었다. 베트남 전쟁, 쿠바 미사일 위기, 동서독의 분단과 같은 국제 정세가 남북한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고, 정치적으로는 유신 체제의 도입을 앞둔 시점이었다. 국민 개개인은 늘 ‘체제의 적’이 될 수 있다는 불안 속에서 살았고, 조금이라도 이념적으로 의심받을 여지가 있다면 사회적 매장을 각오해야 했다. <하이재킹>은 이러한 시대 분위기를 짙게 깔며, 작은 사건 하나조차 얼마나 정치적으로 증폭될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영화는 특정한 주인공을 내세우기보다는, 항공기 안 다양한 인물군의 심리와 행동을 따라가며 입체적인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조종사, 승무원, 승객, 납치범까지 각기 다른 위치와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이념’이라는 이름 아래서 어떻게 서로 부딪히고, 때로는 공감하며, 무엇보다 생존을 위한 선택을 강요받는지 세밀하게 그려낸다.
특히 인상 깊은 장면은 조종사가 북한 측의 회유와 협박 속에서 조종간을 잡고 고민하는 순간이다. 그는 단순히 납치당한 피해자일 뿐이지만, 체제 전복의 도구로 이용되려는 찰나에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생존 사이에서 무거운 결정을 내린다. 이는 관객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과연 나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승무원 캐릭터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그녀는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승객을 보호하려 하지만, 북한에서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는 점차 자신의 의지마저 흔들리게 된다. 처음에는 단호하고 냉철한 인물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념이라는 파도에 휩쓸리는 한 인간으로 변해간다. 그 변화는 단순한 감정선이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내면에 미치는 영향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장치다.
북한이라는 '거울' 속의 자신
영화의 중반 이후, 납치된 이들이 북한에 도착하면서 분위기는 완전히 바뀐다. 이곳은 더 이상 익숙한 세상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시, 의심과 선전의 일상화, 자유의 박탈은 인물들을 극도의 긴장감 속에 몰아넣는다. 북한은 단순한 납치범의 근거지가 아니라, 철저한 이념 통제 시스템이 작동하는 하나의 ‘세트장’으로 기능한다. 이들은 북한 체제에 협조하지 않으면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협조하면 남한에서 돌아가도 반역자로 살아야 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인다.
이 시점부터 영화는 '납치극'에서 '이념의 감옥'으로 장르적 전환을 이룬다. 북한의 선전선동이 얼마나 치밀하게 진행되는지, 그리고 인간의 신념조차 어떻게 조작되고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체제가 인간을 어떻게 '형성'하는지를 되묻는다. 특히 납북 이후 북한 체제에 점차 적응해 가는 몇몇 인물의 모습은 인간의 유연성과 동시에 무력함을 보여준다.
<하이재킹>은 분명 과거의 실제 사건을 다룬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가 관객에게 남기는 메시지는 단순한 역사 재현을 넘어서 있다. 여전히 분단 상태인 한반도, 대치 중인 남북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쉽게 ‘적’으로 낙인찍힐 수 있는가?
이 영화는 정치나 역사에 관심이 많지 않은 관객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오늘날 우리 사회 속에서도 이념은 여전히 누군가의 입장을 강요하고, 표현을 제한하며, 타인을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은가. 인터넷 댓글 하나로, 정치 성향 하나로 누군가의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이 시대에, 이념은 결코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인간을 중심에 둔 이야기
결국 <하이재킹>은 이념을 말하는 영화가 아니라 인간을 말하는 영화다. 체제가 아닌, 사람을 중심에 둔 서사는 그 자체로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분단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이 영화는 단순한 공포나 스릴, 또는 정치적 메시지를 넘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는 이념 앞에서 얼마나 나약한가, 그리고 인간은 상황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 <하이재킹>은 그 질문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게 하고, 오늘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무겁지만 꼭 필요한 영화.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