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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화는 종종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야기’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끌어낸다. 소란스럽지 않지만 잔잔히 스며드는 정서, 격한 감정 대신 조용한 울림.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강변의 무코리타 (川っぺり ムコリッタ)』는 그 정서의 정점에 서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화려함이나 극적인 사건 없이도, 인물들의 숨결과 일상의 소리만으로도 보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운다. 그리고 무엇보다,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될 수 있는지를 조용히, 그러나 깊게 일러준다.
🏠 ‘무코리타’ — 상처 입은 이들의 작은 안식처
영화는 주인공 야마다(마츠다 류헤이)가 한적한 시골 마을로 이주하면서 시작된다. 그가 정착한 곳은 강변의 허름한 아파트 ‘무코리타’. 얼핏 보면 낡고 쓸쓸한 공간이지만, 이곳엔 각자의 아픔을 품은 사람들이 모여 산다. 사회로부터 조금은 비켜난, 외면당한 이들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조용히 공존하는 곳. 처음엔 혼자이고 싶어 했던 야마다 역시, 이 공동체의 따뜻한 온기에 서서히 스며든다.
‘무코리타’라는 공간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다. 그것은 현대인의 고립과 단절을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치유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인물들은 서로에게 큰 기대를 하거나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저 곁에 머물고, 밥을 나누며, 말없이 함께 있어주는 것으로 충분한 위로가 된다. 이는 자극적이고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잊고 지냈던 인간관계의 본질을 일깨운다.
이들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려 애쓰지 않지만,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특히 이웃 쿠사카와의 관계는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끊임없이 야마다에게 반찬을 나누고, 말을 걸고, 때로는 귀찮을 정도로 다가오지만, 그 모든 행동은 결국 ‘함께 살아간다’는 따뜻한 메시지를 전한다.
🌿 인물들의 결핍, 그리고 조용한 연대
야마다를 비롯한 무코리타의 주민들은 모두 ‘결핍’을 안고 있다. 감옥에서 막 출소한 야마다는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하지만, 내면에 자리 잡은 죄책감과 외로움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그런 그의 곁으로 다가오는 인물이 쿠사카(에이타)다. 수다스럽고 소박한 일상에 가치를 두는 그는 야마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반찬을 나눈다. 그의 행동은 처음엔 부담스럽고 귀찮게 느껴지지만, 점차 그것이 진심 어린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음’ 임을 깨닫게 된다.
또한 절에서 일하는 시라이시 부인(미야자와 리에)은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야마다에게 소소한 따뜻함을 건넨다. 그녀의 존재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그 양쪽 모두를 이해하는 사람처럼 다가온다. 말수가 적지만 깊은 눈빛을 지닌 아파트 관리인은 무코리타의 정신적 중심처럼 존재하며, 묵묵히 사람들을 지켜본다. 이처럼 인물들은 큰 드라마 없이도 서로의 상처에 조용히 반응하며, 특별하지 않지만 깊은 연대를 형성한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모티프 중 하나는 ‘밥’이다. 혼자 먹는 밥과 누군가와 함께 먹는 밥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무코리타에서는 밥을 매개로 이웃들과의 관계가 형성되고, 인간적인 유대가 자라난다. 쿠사카가 야마다에게 건네는 반찬, 함께 나누는 소박한 식사는 단순한 식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 행위 속엔 ‘나는 너를 기억하고 있다’, ‘나는 네 곁에 있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전작 『카모메 식당』이나 『안경』 등에서도 ‘식사’라는 일상의 행위를 치유의 방식으로 활용해 왔다. 『강변의 무코리타』에서도 그 기조는 이어진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단순한 행위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끈이 되고,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순간으로 승화된다.
💭 여운과 감정의 파동
이 영화가 다루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는 ‘죽음’이다. 야마다는 무연고 사망자들의 유골을 관리하는 일을 맡는다. 아무도 찾지 않는 유골, 외롭게 생을 마감한 이들의 흔적은 야마다를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영화는 죽음을 무겁고 절망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고요한 연장을 보여주듯, 죽음을 통해 오히려 살아 있는 이들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되짚는다.
사람은 결국 누군가의 기억 속에 존재함으로써 살아 있는 것이 아닐까. 무연고 사망자의 유골을 절로 이관하는 일은 어찌 보면 ‘잊힘’의 시작이지만, 영화는 그런 현실 속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고, 밥을 나누며, 곁에 있어주는 삶의 따뜻함을 강조한다.
『강변의 무코리타』는 매우 느리게 흘러간다. 드라마틱한 사건도 없고, 갈등도 거의 없다. 카메라는 인물의 작은 표정, 조용한 일상의 소리—물 흐르는 소리, 나뭇잎 흔들림,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를 길게 담아낸다. 어떤 장면은 너무 길어 느리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그 ‘멈춤’ 속에서 오히려 진짜 감정이 자란다. 이 침묵은 때로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데도 묘하게 위로받은 기분이 든다. 그 감정은 마치 누군가가 내 옆에 말없이 앉아 있어 준 것 같은 따뜻함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자극적인 변화나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단지 "괜찮아, 너 혼자 아니야"라는 조용한 말 한마디였을지도 모른다.
『강변의 무코리타』는 소란스러운 세상에 지친 우리에게 조용한 쉼표를 건넨다. 말없이 곁에 있어주는 것, 함께 밥을 먹는 것,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 이 영화는 그런 평범한 행위들이 얼마나 깊은 위로가 될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하루의 끝에서 마음이 고단할 때, 이 영화를 조용히 틀어보자. 무코리타라는 작은 공간이 당신에게도 작지만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다시금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